외된 폰 호르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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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외덴 폰 호르바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의 아들로, 20세기 초 독일어를 사용하며 활동한 작가이다. 그는 1931년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했으며, 나치 정권의 등장으로 망명 생활을 하다 1938년 파리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호르바트의 작품은 대중 문화, 정치, 역사적 주제를 다루며, 특히 파시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희곡 《빈 숲 속의 이야기》, 《카시미르와 카롤린》, 소설 《신 없는 청춘》, 《우리 시대의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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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된 폰 호르바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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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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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외된 에드문트 요제프 폰 호르바트 |
출생일 | 1901년 12월 9일 |
출생지 | 수샤크, 리예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현재 크로아티아) |
사망일 | 1938년 6월 1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제3공화국 (현재 프랑스) |
국적 | 오스트리아-헝가리 (1918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1918년부터), 헝가리 |
직업 | 극작가 및 소설가 |
활동 기간 | 해당 정보 없음 |
대표작 | 해당 정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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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호르바트는 1920년 학생 시절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2년 초 학위 없이 대학을 중퇴한 후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이후 잘츠부르크와 무르나우 암 슈타펠제에서 살았다. 1931년, 에리크 레거와 함께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했다. 1933년, 나치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시작되자 비엔나로 이주했다.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한 합병 이후, 파리로 망명했다.[1][2]
1938년 6월,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폭풍우가 치는 동안, 마리니 극장(Théâtre Marigny) 맞은편에서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에 맞아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며칠 전 호르바트는 친구에게 "나는 나치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아... 두려워해야 할 더 나쁜 것들이 있어, 즉 왜 두려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두려워하는 것들이지. 예를 들어, 나는 거리가 무서워. 길은 적대적일 수 있고, 파괴할 수도 있어. 거리가 나를 두렵게 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년 전 호르바트는 번개에 대한 시를 썼다. "그래, 천둥,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번개와 폭풍. 공포와 파괴."[1][2]
호르바트는 파리 북부에 있는 생투앙 묘지에 묻혔다. 1988년, 그의 사망 50주년이 되자 그의 유해는 비엔나로 옮겨져 하일리겐슈테터 묘지에 다시 안치되었다.
2. 1. 유년 시절 및 교육
외된 폰 호르바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인 아버지 에드문트 요제프 호르바트와 어머니 마리아 루루 헤르미네 호르바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슬라보니아 출신 헝가리인이었고, 어머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인 가문 출신이었다.[1]1908년부터 외된은 부다페스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이후 라코차이움에서 헝가리어로 교육을 받았다.[1] 1909년 그의 아버지는 귀족 작위를 받고 뮌헨으로 발령받았지만, 외된은 동행하지 않았다.[1] 1913년, 호르바트는 프레스부르크와 빈에서 중등학교를 다니면서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배웠고, 마투라(고등학교 졸업장)를 취득한 후 상부 바이에른의 무르나우 암 슈타펠제에서 부모와 다시 만났다.[1] 1919년부터는 뮌헨의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1]
2. 2. 작가 활동
외된 폰 호르바트는 학생 시절인 1920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22년 초, 학위 없이 대학을 중퇴한 후 베를린으로 이사했다. 이후 그는 잘츠부르크와 무르나우 암 슈타펠제에서 살았다. 1931년, 에리크 레거와 함께 클라이스트 상을 수상했다. 1933년, 나치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시작되자 비엔나로 이주했다.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한 합병 이후, 호르바트는 파리로 망명했다.[1][2]2. 3. 죽음
외된 폰 호르바트는 1938년 6월, 파리 샹젤리제에서 폭풍우가 치는 동안 마리니 극장 맞은편에서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에 맞아 사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며칠 전 호르바트는 친구에게 "나는 나치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아... 두려워해야 할 더 나쁜 것들이 있어, 즉 왜 두려운지 알지도 못하면서 두려워하는 것들이지. 예를 들어, 나는 거리가 무서워. 길은 적대적일 수 있고, 파괴할 수도 있어. 거리가 나를 두렵게 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년 전 호르바트는 번개에 대한 시를 썼다. "그래, 천둥,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번개와 폭풍. 공포와 파괴."[1][2]외된 폰 호르바트는 파리 북부에 있는 생투앙 묘지에 묻혔다. 1988년, 그의 사망 50주년이 되자 그의 유해는 비엔나로 옮겨져 하일리겐슈테터 묘지에 다시 안치되었다.
3. 작품 세계
호르바트는 작품에서 대중 문화, 정치, 역사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었으며, 특히 유럽에서 파시즘의 부상과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했다.
3. 1. 주요 주제
호르바트의 작품에서 중요한 주제는 대중 문화, 정치, 역사였다. 그는 특히 유럽에서 파시즘의 부상과 그 위험성을 경고하려 했다. 호르바트의 더 오래 지속되는 인기 작품 중 하나인 Jugend ohne Gott|신 없는 청춘de은 처음에는 기회주의자였지만 인종 차별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나치 선전에 속수무책으로, 학생들을 비인간화하는 불만을 품은 교사의 시각에서 나치 독일의 청소년을 묘사한다.그의 소설 ''Ein Kind unserer Zeit''(《우리 시대의 아이》)의 영어 제목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작곡된 마이클 티펫의 오라토리오 (1939–1941)에 사용되었다.
4. 작품 목록
Geschichten aus dem Wiener Wald|빈 숲 속의 이야기de
4. 1. 희곡
- Das Buch der Tänzede, 1920
- Mord in der Mohrengassede, 1923
- Zur schönen Aussichtde, 1926
- Revolte auf Côte 3018de, 1927; Die Bergbahnde로 개작, 1929
- Sladek der schwarze Reichswehrmannde, 1929, 원래 Sladek oder Die schwarze Armeede
- Rund um den Kongreßde, 1929
- Italienische Nachtde, 1930
- Geschichten aus dem Wiener Waldde, 1931, 같은 해 클라이스트 상 수상
- Glaube, Liebe, Hoffnungde, 1932
- Kasimir und Karolinede, 1932
- Die Unbekannte aus der Seinede, 1933
- Hin und Herde, 1934
- Don Juan kommt aus dem Kriegde, 1936
- Figaro läßt sich scheidende, 1936. 기젤러 클레베는 이 작품을 바탕으로 1963년 그의 오페라 동명 오페라의 대본을 썼다. 엘레나 랑거의 2016년 오페라 Figaro Gets a Divorce영어은 데이비드 파운트니의 대본을 바탕으로 이 희곡을 기반으로 한다.
- Pompeji. Komödie eines Erdbebensde, 1937
- Ein Dorf ohne Männerde, 1937
- Himmelwärtsde, 1937
- Der Jüngste Tagde, 1937
4. 2. 소설
- Geschichten aus dem Wiener Wald|빈 숲 속의 이야기de
- ''36시간'' (1929)
- ''영원한 속물'' (1930, The Eternal Philistine|이터널 필리스틴영어, 2011년 영어 번역본)
- ''신 없는 청춘'' (1938, The Age of the Fish|디 에이지 오브 더 피쉬영어, 1939년 영어 번역본)
- ''우리 시대의 아이'' (1938, A Child of Our Time|어 차일드 오브 아워 타임영어, 1939년 영어 번역본)
4. 3. 기타 산문
- 빈 숲 속의 이야기
- 《스포츠 동화》(Sportmärchen, 1924–1926)
- 《인터뷰》(Interview, 1932)
- 《사용 설명서》(Gebrauchsanweisung, 1932)
5. 대중문화 속 호르바트
- 크리스토퍼 햄프턴의 희곡 《할리우드 이야기》(1982년, 1992년 텔레비전 드라마 각색)는 가상의 호르바트를 묘사한다. 그는 나뭇가지가 떨어지는 사고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하인리히 만과 같은 망명 독일 작가들이 영화 산업을 위해 글을 쓴다.
- 다닐로 키쉬의 단편 소설 "조국 없는 남자"는 1994년 작품집 《류트와 흉터》에 게재되었으며, 폰 호르바트의 죽음을 허구적으로 묘사한다.
- 덩컨 맥밀란은 2012년 국립 극장 스튜디오와 핀보로 극장을 위해 폰 호르바트의 《전쟁에서 돌아온 돈 후안》을 각색했다. 이 업데이트된 작품은 현대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갈등과 트라우마의 영향을 탐구했다. 안드레아 페란이 연출했다.
- 리디아 데이비스의 단편 소설 "산책하는 외된 폰 호르바트"는 2014년 작품집 《할 수 없고, 하지 않을 것이다》에 게재되었으며, 호르바트가 알프스에서 해골을 만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참조
[1]
서적
Rororo publishers
1975
[2]
서적
Heyne publishers
1985
[3]
웹사이트
Don Juan Comes Back From The War – Finborough Theatre
https://finboroughth[...]
2021-09-11
[4]
간행물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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